기차 여행의 꿈, 경북관광순환테마열차
코레일 대전충남본부 영업처 강병규(2012.8.)
기차보다 더 빠른 사람을 만나다.
2009년 3월 16일 오전 11시경 경북 성주군 문화회관 2층 회의실, 코레일 경북남부지사의 김종훈 영업팀장과 나, 경상북도 관광마케팅사업단 이희도 단장이 마주 앉았다.
내가 기획안의 첫 페이지를 펼쳐 보였다. 경북관광순환테마열차 운행개념도였다.
순간 이희도 단장의 눈이 반짝였다.
“이거... 되는 겁니다. 합시다.”
그걸로 끝이었다. 3페이지 중 나머지 2페이지는 대강의 설명만으로 충분했다.
그로부터 3일 후, 이희도 단장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예산 6억 확보됐습니다. 당장 시작합시다.”
경북관광순환테마열차를 기획한 지 1년여 만이었다. 마침내 기차보다 더 빠른 사람을 만난 것이었다. 아! 일이 되려면 이렇게도 되는구나...
한국관광의 별이 된 경북관광순환테마열차
결론부터 말하면, 경북관광순환테마열차는 철도 마케팅의 성공 사례 중 하나이다. 앞으로는 벌지만 뒤로는 밑지는 그런 통상의 관광열차가 아니다. 경상북도로부터 연간 12억 원의 고정적인 운행수익을 보장 받는 새로운 수익모델이다. 2009년 12월 2일 첫 운행을 시작한 이래 정기열차로 편성되어 하루 2차례씩 연중 운행되고 있다. 열차 내에서 다양한 공연과 이벤트, 노래방, 와인시음 등을 즐길 수 있다. 열차가 경유하는 역의 12개 시군에서 지역의 테마관광상품을 개발하고 셔틀버스로 연계하는 친환경 녹색관광의 대명사로, 2010년도에는 제주 올레 길, 전주 한옥마을 등과 함께 ‘한국관광을 빛낸 6대 별’ 가운데 하나로 선정되기도 했다. 또한 금년 들어 본사 차원에서 추진 중인 중앙선 영동선 태백선 순환관광열차의 선행 모델이기도 하다.
꼭 들려주고 싶은 것
이 글을 시작한 이유는, 코레일 사람들에게 이것 하나만큼은 꼭 들려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지자체 공무원들의 의사결정 속도에 관한 것이다. 그동안 만났던 경상북도 관광마케팅사업단과 문경시 소속 공무원들의 의사결정 속도는 코레일에서는 상상조차하기 어려울 정도로 빠른 것이었다. 앞에서 소개한 이희도 단장의 신속한 의사결정이 아니었더라면 경북관광순환테마열차는 태어나기 어려웠을 것이다. 첫 미팅에서 즉석 의사결정을 하고 불과 3일 만에 6억 원의 예산을 확보해낸 그 놀라운 초스피드 행정력!
또한 문경시 공무원들은 문경선과 가은선을 철도관광노선으로 개발하기 위한 계획을 세우자마자 철도공사와 철도시설공단을 문턱이 닳을 정도로 드나들었다. 또 저 멀리 경남 함안에 있던 철도차량제조공장을 십여 차례 방문 설득하여 문경시로 유치해 올 정도의 끈기도 발휘하였다. 그 바탕에도 문경시의 신속한 의사결정이란 든든한 지원시스템이 있었다.
지상에서 가장 빠른 KTX열차를 운영하는 코레일 조직의 의사결정 속도는 어떤가? 직원들이 참신한 아이디어를 내면 신속한 의사결정으로 지원하는 그런 시스템을 우리도 갖추고 있는가? 앞으로 코레일이 지자체 등과 추진하는 각종 관련 사업에서 주도권을 행사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의사결정 속도를 훨씬 앞지를 수 있어야 할 것이란 생각이 들 때마다 마음이 조급해진다.
철길은 이어져야 한다.
이 글을 읽는 이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먼저 경북선과 문경선, 가은선의 당시 상황을 간단히 소개하고 넘어가는 게 좋겠다. 경북선은 1980년대 이후 석탄산업이 사양길에 접어들면서 수송수요가 급감하여 하루 여객열차 3왕복, 화물열차 2왕복만 운행하는 대표적 적자 노선이다.
문경선은 경북선 점촌역에서 분기하여 문경역에 이르는 22.3km구간. 그 구간 중 점촌에서 주평역까지는 하루 1번 화물열차가 들어가고, 불정역에는 코레일이 운영하는 팬션열차가 있지만 역사와 구내는 문경시 소유이다. 나머지 구간은 역사가 모두 철거된 상태....
가은선은 문경선 진남신호소에서 분기하여 가은역까지 9.6km구간을 줄곧 강변을 끼고 달리는 마치 그림처럼 아름다운 철길이다.
2004년도 공사전환기의 혼란을 틈타 문경시에 헐값으로 매각되었다. 문경시에서는 문경선과 가은선에 레일바이크 사업을 해 오다가,
2008년도부터 가은선 선로를 개량하고 관광열차를 제작할 기업도 유치하는 등 가은선 철도관광사업을 본격 추진하기 시작하였다. 2009년도부터는 한국철도시설공단과 함께 문경선을 공동 개발하기로 하고, 문경선에 관한 일반철도사용계약도 이미 체결해 놓은 상태였다.
문경시의 구상은 불정역을 문경권 철도관광사업의 전진기지로 삼고, 새로 만드는 가은선 관광열차도 불정역에서 출발시키려는 것이었다. 그리되면 문경선과 가은선은 경북선과 코레일로부터 영영 단절되는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안 된다. 철길은 이어져야 한다. 그것이 경북선 신활력 프로젝트를 추진하게 된 배경이었다.
내 기차여행의 꿈
경북관광순환테마열차는 2008년 4월,『경북선 신활력 프로젝트』를 시작할 때부터 구상한 것이다. 이 열차를 구상하게 된 직접적인 동기는, 당시 문경시에서 추진하던 가은선 관광열차사업이었다.
오래전부터 꼭 타 보고 싶은 열차가 있다. 일본의 사가노 도롯코열차(嵯峨野トロッコ列車)처럼 증기기관차가 끄는 창문 개방형 관광열차이다. 문경시에서 제작을 추진 중이던 열차 모델이 바로 사가노 도롯코열차였던 것이다. 내 꿈은 그 관광열차를 불정역이 아닌 경북선 점촌역에서 출발시키는 것이었다. 기적소리 멈춘 지 이미 오래되어 황량해진 점촌역 1번 타는 곳에서 북적거리는 승객들과 함께 가은으로 가는 도롯코열차를 타는 것, 마침내는 그 열차가 경북선 김천~영주간의 아름다운 풍경 속을 한가하게 달리는 것, 그것이 바로 내 기차여행의 마지막 꿈이었다.
길이 없으면 뚫어서라도 간다.
문경시청을 몇 차례 찾아가 담당자들과 관광협력사업 이야기를 해보았다. 하지만 그들은 내가 놀랄 정도로 차디찬 반응뿐이었다. 이들이 왜 이러지? 몇 번의 만남을 통해 분위기가 좀 누그러지자 그 까닭을 알 수 있었다. 그동안 문경시에서는 대전의 코레일 본사를 수차례 찾아가 문경권 철도관광사업에 관하여 협조를 구했던 모양인데, 당시 코레일에서는-그들의 표현을 빌리자면-몇 번을 찾아가도 그 누구하나 거들떠보는 사람이 없더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뒤늦게 경북남부지사란 곳에서 불쑥 나타나 대화를 해보자고 하는 것이 영 마뜩치 않았던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들이 이미 정해 놓은 사업파트너는 따로 있었다. 한국철도시설공단이었다.
처음부터 길이 막힌 셈이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문경시보다는 아예 경상북도를 움직이게 하자는 것이었다. 경북선을 순환하는 관광전용열차를 만들어 점촌역에서 가은선 관광열차를 접속하도록 하자. 문경시에서 내세운 친환경 문경관광 콘셉트에 맞게, 전국 어디서나 승용차가 아닌 기차를 타고 와서 기차를 즐기다가 기차로 돌아가는 완벽한 친환경 관광상품이 완성되는 셈인데, 가은선 관광열차가 점촌역으로 안 나올 명분이 있나? 길이 없으면 이렇게 뚫어서라도 간다!
구슬 꿰어 보배 만들기
한국철도 노선도를 펼쳐보면 몇 개의 순환선이 그려진다. 경부선-동해남부선-대구선을 잇는 경남북 순환선, 경부선-경북선-중앙선-대구선을 잇는 경북순환선, 중앙선- 영동선-태백선을 잇는 3도 순환선, 그리고 호남의 남도순환선, 충남순환선 , 서울의 교외선 등... 그 중에서 유일하게 동일 지자체 권역을 순환하는 노선이 있으니 그게 바로 경북순환선이다.
노선도를 따라 역명을 하나씩 짚어 가면서 순환 코스를 그려 보았다. 이거 정말 얘기가 되잖아! 전국 최초이자 지자체 중 유일한 순환관광열차. 더욱이 경북 지역은 곳곳마다 관광지와 특산물이 즐비한 곳이니, 이를 하나로 묶고 지역과 지역을 이어주는 순환열차라면! 지역관광 활성화는 물론 홍보 효과만으로도 경상북도에서 당연히 좋아할 상품이란 확신이 들었다. 구슬을 꿰고 보니 이런 보배가 없었다.
<경북관광순환테마열차 운행 구상 초안>
무모한 집념, 불효를 자초하다
그런데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을 하지? 내가 경북선 신활력 프로젝트를 기획하면서 구상한 추진단계는 이것이었다. 제1단계, 점촌역을 기차놀이 테마역으로 만들어 사람들이 몰려오게 해서 경북선에 언론과 지자체의 이목을 집중시킨다. 제2단계, 완목식 신호기가 남아있는 주평역을 철도시설테마역으로 조성하여 문경시와 협력사업을 전개한다. 경북관광순환테마열차는 마지막 제3단계 사업이었다.
점촌역을 살리고 주평역도 살리면 점촌-주평-불정역을 잇는 철도테마역이 완성되고, 가은선 관광열차는 자동적으로 점촌역까지 나오게 된다. 그러면 순환관광열차로 경부선과 중앙선의 관광객을 경북선과 접속시키는 것이 전체 구상이었다.
2008년 4월 당시 나는 경북남부지사 영업팀에서 관리업무를 담당하면서 경북선신활력프로젝트도 전담하다시피 했다. 아직 시작 단계인 점촌 테마역에 올인해야 할 시점이었다. 그래도 틈틈이 본사 관련 부서, 대구지사와 경북북부지사 등에 계획서를 보내 반응을 살펴보았다. 본사에서는 변동비 등 운행소요 비용을 충당할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해달라고 했다. 변동비? 그게 뭐지? ^^!
특히, 대구지사와 경북북부지사와는 열차운행과 승무원 운용 등 제반 사항에 대해 구체적인 실무 검토가 필요하였다. 마침 당시 경북남부지사와 대구지사, 경북북부지사는 3개 지사간 정기적인 협의체를 운영하고 있었다. 2008년 5월 21일 영주에 있는 경북북부지사에서 3개 지사장, 팀장 및 실무자가 모여 협의하는 자리에서 경북선 신활력 프로젝트와 경북관광순환테마열차 운행계획을 발표할 예정이었다.
그 무렵 가정적으로는 산본 형님댁에 계신 어머니가 위중하신 상태였다. 하지만 꼭 그 회의에 참석하여 계획을 직접 발표하고 싶었다. 그래서 전날 산본에 들러 어머님을 뵙고 김천으로 내려와 영주로 향하였다. 협의회 마치고 곧바로 집에 올라 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영주로 가는 도중 점촌역에서 어머니의 부음을 듣고 발길을 돌려야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일에 대한 무모한 집념이 어머니의 임종을 지키지 못한 불효를 자초한 것이었다.
그 일이 있은 후부터 경북관광순환테마열차에 관해서는 전혀 진척이 없는 상태가 계속되었다. 아직 때가 되지 않은 것이었다.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은
이 일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도움을 준 이들이 많다. 경북관광순환열차가 운행을 하게 된 것은 사실 전적으로 그들의 덕분이다. 내 역할은 기획을 하고 함께 일할 이들을 찾아다닌 것뿐이니까. 그래서 미리 분명하게 해두고 이야기를 계속해야겠다. 이 일은 결코 나 혼자가 한 것이 아니다. 경북남부지사, 본사, 경상북도, 대구지사, 경북북부지사가 함께 한 것이다.
특히 2009년 9월 조직개편에 따라 경북남부지사가 해체되면서 대구지사로 업무를 이관했기 때문에 내가 말할 수 있는 부분도 실은 그 때까지의 추진경과일 뿐이다. 그해 9월부터 12월 2일 첫 운행 때까지의 실질적인 업무는 대구지사와 본사 여객본부와 차량기술단 등 관련 부서에서 다 한 셈이다.
이 글이 지닌 이런 한계 때문에 걱정되는 것이 있다. 이 사업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한 이들의 역할을 충분히 소개할 수 없다는 점이다. 그 때문에 이 글을 읽으면서 ‘어? 왜 내 얘기가 없어?“하고 서운해 할 수도 있겠다 싶다. 또 일일이 기록해 둔 것도 없다보니 불명확하거나 다소 과장된 표현도 있을 수 있다. 그 점에 대해서는 미리 양해를 구한다.
일에는 때가 있고 임자가 있다.
2008년도의 점촌역 테마역사업은 기대 이상의 대성공을 거두었다. 그해 9월과 10월 불과 2개월동안 ‘신나는 동화 속 세상, 점촌기차역’을 찾아 온 어린이 단체만도 136개 8,493명에 달했다. 한해동안 각종 TV 프로그램과 라디오, 신문 등에 점촌역이 소개 된 것을 모아보니 총 49건이나 되었다. 마침내 경북선이 되살아나기 시작한 것이었다. 당연히 지자체에서도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당시 문경시장이 문경시 공무원들에게 점촌역 직원들을 본받으라고 했다는 이야기도 들렸다.
주평역의 코스모스와 완목식 신호기, 불정역 팬션열차도 언론을 통해 집중 조명을 받기 시작했다. 점촌역에 관한 언론 홍보 섭외를 할 때마다 의도적으로 주평역과 불정역을 꼭 포함해서 소개를 했기 때문이었다. 이로써 2008년도의 제1.2단계 사업은 순조롭게 마무리되었다. 2009년도에 들어서자 마침내 경북관광순환테마열차를 본격 추진할 차례가 되었다.
일도 때가 되어야하고 임자를 만나야 이루어진다는 것이 그동안의 경험으로 터득한 나름의 지론이다. 경북관광순환테마열차도 바로 그랬다. 기획은 훨씬 이전에 했지만 2009년도가 되어서야 시작할 수 있었다. 이전에도 다들 의욕은 있었지만 이런저런 벽에 막혀 진척이 없었는데, 사람들이 바뀌자 일이 술술 풀리기 시작했다. 2009년도 들어 본사에는 이천세 여객본부장이, 대구지사에는 이채권 지사장이, 경북남부지사에는 김종훈 영업팀장이 새로 포진을 하였다. 더욱이 전임 박진성 영업팀장과 박삼희 차장도 본사 여객본부로 가서 든든한 지원세력이 되었다. 마침내 임자들이 나타난 것이었다.
전격 회동, 그리고 사전 공작
서두에서 이야기했듯이 경북관광순환테마열차사업의 본격 추진은 경상북도 관광마케팅사업단 이희도 단장의 신속한 판단과 추진력이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어느 정도는 사전 공작(?)의 효과가 나타난 것이기도 했다. 사연인 즉 이렇다.
당초 이 열차를 구상하면서 목표로 삼은 것은 문경시가 아니라 경상북도였다. 당연히 경상북도의 의지와 대화 통로부터 확인해야 했다. 알아보니 경상북도는 서울시 전동차의 안과 밖을 온통 경북관광 이미지로 래핑하고, 차내에는 지역별 특산품을 홍보하는 기발한 아이디어를 실현시킬 정도로 관광사업 활성화에 주력하고 있었다. 특히 관광마케팅사업단이란 T/F조직까지 가동하고 있었다. 됐다. T/F조직이라면 뭔가 새로운 아이템을 필요로 할 것이다!
2008년말경으로 기억이 된다. 대구지사 영업팀의 최영광 차장을 통해 관광마케팅사업단에 경북관광순환테마열차사업(안) PPT 자료를 보냈다. 역시 예상했던 반응이 전해졌다. “경상북도에서는 코레일에서 제안만 해오면 오케이랍니다.”
마침내 2009년 3월 16일로 예정된 경북남부지사 영업팀 주관 성주 참외 팸투어에 경상북도의 이희도 단장도 참석한다는 정보가 입수되었다. 더욱이 이 단장은 신임 김종훈 영업팀장과는 잘 아는 사이라고 했다. 때를 맞추어 내가 직접 관광열차사업계획을 설명하겠노라 제의를 했고, 성주군 문화회관에서의 전격 회동이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나는 짐짓 모른 체 했지만, 이희도 단장은 사전에 나의 사업계획을 훤히 다 알고 온 것이었다.
일사천리
일을 하다보면 일의 어렵고 쉬움을 떠나 일종의 재미가 느껴질 때가 있다. 점촌 테마역을 만들 때도 그랬지만, 경북관광순환테마열차를 추진하면서도 더욱 그랬다. 콤비 플레이란 바로 이런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김종훈 영업팀장과 나, 이희도 단장은 일단 말이 잘 통했다. 말이 잘 통하다 보니 일의 진척도 너무 앞서가는 거 아닌가 싶을 정도로 빨랐다.
2009년 3월 16일 성주군에서의 첫 회동 이후 3월 23일 대구지사에서 실무회의와 현장 답사를 진행하였다. 그 동안에 열차 종별 장단점 비교, 노선별 원가분석, 기관사와 열차승무원 인건비, 동력비, 차량유지보수비 산출, 운행 비용과 수익 분석, 열차편성 및 운행계획, 관광열차 전세운임 징수방안, 패키지상품 개발 방안, 코레일과 경상북도간 역할 분담 등에 대한 세부 검토 결과를 담은 제안서를 작성하였다. 불과 1주일 안에 구체적인 사업 제안서를 만들어 낼 수 있을 정도로 속도가 붙는 것이었다.
하지만 걸림돌도 있었다. 객차전세운임 할인율 을 놓고 한동안 밀고 당기기가 계속되었다.
이희도 단장은 전체 스케일은 크게 잡으면서도 1인당 운임 산출방식 등 디테일한 부분에서는 놀라울 정도의 치밀함을 보였다. 역시 사업가 출신 다운 면모였다. 하지만 이미 큰 틀을 정한 터이라 조율하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다만 경상북도와 본사 사이를 몇 번씩 오가는 수고로움은 감수해야 했다.
장벽이 존재하는 이유
‘장벽은 우리를 막으려고 있는 게 아니다. 장벽은 우리가 무언가를 얼마나 간절히 원하는 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존재한다. 장벽은 간절히 원하지 않는 사람을 막으려고 있는 것뿐이다.’ 랜디 포시 교수의 『마지막 강의』에 나오는 이 말을 지금도 나는 가슴으로 읽는다.
경북관광순환테마열차 사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도 장벽은 곳곳에 있었다. 가장 큰 장벽은 막상 테마열차로 운행할 열차가 없다는 것이었다. 당시 개조작업을 진행 중이던 RDC동차 1개 편성을 염두에 두고 일을 진행했는데, 첫 개조차량은 10월경에나 나오는데다, 2009년도 개조분 전량은 이미 노선별 투입계획이 확정되어 있는 상황이었다.
두 번째 장벽은 본사의 반응이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소극적인 것이었다. 하긴 충분히 이해가 가는 대목이다. 당장 각자 맡고 있는 눈앞의 현안만도 벅찬데, 지사에서 당장은 있지도 않은 열차로 모험에 가까운 사업을 벌이려는 데, ‘그래 빨리해 보자’며 팔 걷고 나설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당연히 이것저것 검토 관련 근거 자료 요구가 많았다.
경상북도에서는 예산까지 다 확보해 놓고 양보할 거 다했는데도 꾸물거린다고 서운해 하고, 본사는 본사대로 뭔가 손에 잡히게 없다고 확답을 미루고.... 그래서 추진력을 확보하는 데 도움이 될까 해서 본사 주관 신상품경진대회에 출품을 했다. 웬걸? 예선 탈락... 나중에 들은 얘기인즉 ‘실현 가능성이 없어서’ 탈락시켰다고 했다. 그 말을 들으면서 실소하고 말았다. 경상북도에서는 내 계획서를 토대로 대학교에 연구용역을 의뢰했고, 번듯한 연구 결과물까지 내놓은 판인데... 암튼 진퇴양난이었다. 그럴수록 오기가 발동했다. 그래도 한번 가 보자!
지자체를 총 출동시키다.
이희도 단장과 이야기를 하다보면 잘 통했다. 이런저런 아이디어가 바로 실행이 되곤 하였다. 2009년 7월 9일에 시행한 경북관광순환테마열차 시범운행도 그런 케이스였다. 당시 내 입장에서는 본사를 설득할 뭔가 명분이 필요했고, 이희도 단장 입장에서는 경상북도에는 사업이 진행되는 경과를 보여 줘야 했고, 관련 지자체들의 관심을 유도해야 했다. 지역사회와 언론의 관심도 필요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구상한 것이 코레일 본사와 각 지사 관계자, 경상북도 관계자와 학계, 언론계, 그리고 테마열차가 경유하는 12개 시군의 관광담당자 등을 태우고 사전에 시범운행을 하기로 한 것이었다. 경상북도 도지사도 올 예정이라고 했다. 그래서 내가 제안을 하였다. “더 없이 좋은 기회네요, 열차가 운행하는 코스별로 해당 지자체의 관광담당자가 도지사 앞에서 향후 테마열차를 연계한 지역관광 활성화 방안을 PPT로 발표하도록 하시죠?”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동대구에서 출발한 열차가 김천, 상주, 점촌, 예천, 영주, 안동, 의성, 영천을 거쳐 동대구로 순환하는 동안, 열차가 정차하는 곳마다 해당 지자체장등 관계자들이 타는 곳까지 나와서 테마열차를 영접하였고, 지역마다 언론에서 취재를 하였다. 열차가 순환하면서 주요 정차역을 출발할 때마다 그 지역의 지자체에서 나와 경쟁적으로 셔틀버스를 연계한 관광활성화 방안을 발표하였다.
동승했던 뉴질랜드의 쿡 관광대학장은 지역을 순환하는 이런 테마열차는 매우 독창적인 구상이라며, 자기 대학교에서 경북관광순환테마열차 사례를 교재로 활용하겠다고 했다. 지역 언론과 학계, 관광업계의 관심도 뜨거웠다. 경주의 모 유명호텔에서는 나에게 사업계획서를 요청해 왔다. 테마열차가 경주까지 들어 올 것을 준비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참 빠른 사람들 아닌가?
플러스 알파로 통하다
시범운행을 성공적으로 마치자 본사의 분위기에도 변화가 감지되기 시작했다. 바로 그럴 때 뭔가 내밀어야 한다. 본사를 확실히 설득하기 위해서는 뭔가 플러스 알파가 필요했다. 2009년 7월 22일 이희도 단장, 손삼호 박사 일행과 불정역 팬션열차에서 워크숍 겸 대책회의를 가졌다. 문경시청 관계자들도 초청했다. 장래를 위한 포석이었다.
“좋습니다. 한 300억이면 되겠능교?”
역시 이희도 단장은 통이 큰 사나이다. 말도 시원시원하다. 테마열차 운행을 계기로 경북북부권 일대 역세권을 종합 개발하겠다는 구상안을 제시하였다. 관광사업 경쟁력 강화방안으로 정부 예산 350억 원을 유치해서 철도역 주변 정비, 테마공원 조성, 철도역 주변 관광상품 개발 등을 추진하겠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바로 내가 당초 구상했던 경북관광순환테마열차의 최종 완성도이기도 했다.
2009년 7월 31일 본사 여객본부 회의실, 이천세 본부장, 양운학 상품개발팀장, 이용제 차장을 비롯 여객본부 전 직원이 모인 자리에서 이희도 단장과 함께 사업계획을 발표하였다. 그 자리에서 마침내 이천세 본부장의 오케이 사인이 떨어졌다. 통 큰 플러스 알파가 통한 것이었다.
성공 비결은 사람
이야기를 마칠 때가 되었다. 그해 9월 조직개편으로 경북남부지사가 해체되고 사업은 대구지사로 인계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2009년 12월 2일 경북관광순환테마열차는 동대구역에서 성대한 기념식을 갖고 첫 기적을 힘차게 울렸다. 그 당시 나는 본사 경영혁신실에서 근무할 때였다. 그 소식을 전해 듣고 내심 반갑기도 하고 한편으론 서운하기도 했던 기억이 새롭다. 정작 기획을 한 주인공인 나에게 연락조차 없다니...
하지만 생각해 보니 나 혼자만 주인공이 아니었다. 어떤 면에서는 골칫거리였을 사업을 흔쾌히 인계 받아 완성시킨 이채권 지사장, 그리고 열차를 여태껏 잘 운영하고 있는 대구지사 담당자들, 특히 이희도 단장과 손삼호 박사, 그리고 본사의 여객본부와 차량기술단 관계자, 김종훈 팀장 등이 모두 주인공인 것이다.
이 글을 쓰는 동안 안타까운 소식을 들었다. 문경시에서 의욕적으로 추진하던 가은선 관광열차사업이 사실상 중단되었다는 것이다. 공들여 유치했던 차량제작 사업자 쪽에 문제가 있었다고 한다. 그 열차는 아직도 나의 꿈이건만... 하지만 어쩌랴. 일은 의욕도 중요하지만 임자를 잘 만나야 이루어지는 것인데... 그런 점에서 나는 사람을 잘 만난 행운아였다
경북관광순환테마열차가 지금의 성공적 운영에 이르기까지 관심과 지원을 아끼지 않은 모든 이들에게 마음으로부터 감사를 드리며 글을 맺는다.
※이 글은 2012년 8월경 코레일 대전충남본부 영업처 근무 당시에 쓴 글이므로, 현재는 변화된 상황과는 차이가 있을 수 있음.
어느 철도원의 비망록-1 <코레일 경북남부지사 다물군 스토리> (0) | 2017.01.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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