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 우송대 이용상 교수가 집필 중인 <한국철도 120년사>에는 황간역과 관련된 내용이 제범 비중있게 다뤄지고 있습니다.
황간역이 경부선의 중간에 있는 작은 역이지만, 1905년 경부선 개통과 당시 문을 연 이래
지리적으로나 역사적으로, 또한 경제와 문화적 측면으로도 의미가 있는 위치와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더 큰 이유는 이용상 교수가 황간역을 좋게 여기고 깊은 관심과 애정을 갖고 있기 때문이지요.
그중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도 있습니다.(아직 완성된 것은 아니니, 일부 수정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1914년 「조선철도역세일반」을 보면 황간역은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황간역은 충청북도 영동군 황간면 소재이며 역은 황간 군청 소재지 읍내와 10정 떨어진 곳에 있고 부근은 사방이 산으로 둘려 쌓여 농지가 적고 농산물이 많지 않으며 목탄, 흑연의 산지로 이름나 있다.
호수는 총 402호로 조선인이 356호 일본인이 46호 이다. 인구는 1,881명으로 조선인이 1,727명,일본인이 154명이었다. 주변의 관공서는 헌병 파견소. 우편소(우편,전신사무). 공립심상고등소학교. 공립 보통학교. 황간면 사무소등이 있었다. 교통상황은 상주, 영동, 추풍령, 청산 지방에 통하는 도로가 있어도 대부분 험악하여 교통이 나쁘다. 철도이용객은 1일 평균 21명으로 주변 역으로 이동하는 사람이 많고 주로 동절기에 많았다. 황간역에서 주변 역까지의 이동을 보면 영동역에서 승차인원이11인, 하차인원이 9인, 추풍령역에서 5인, 하차가 6인, 김천이 승차 8인, 하차가 8인으로 되어있다.
역세권내의 중요한 생산물을 보면 1913년 통계로 흑연 6,035톤, 보리 6,328석, 목탄 1,004톤, 콩 2,531톤, 장작 394톤, 목화 5,044관, 쌀 9,600석이었다. 주변이 산악이 많아 광산물과 임산물 등이 많았다. 統監府鐵道管理局(1908)『韓國鐵道線路案內』에 보면 역의 약 5리에 청산군 월명동에 광산이 있어 흑연을 생산한 한국흑연회사출장소가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부산의 오토미(小富万次郞)씨가 경영과 채굴권을 가진 흑연광산이 있고 5갱, 인부 60명을 사역하며 1일 최대 채굴량은 70톤으로 광상에서 정거장까지 손으로 미는 경편철도를 부설하여 운반하였다. 팔음산 광산(상주군 모서면 득수동 옥서리) 에서 약13마일 황간역까지 1913년 11월에 19.6km거리에 궤간 640mm의 경편철도를 부설한 것이다. 운반은 무동력의 광산토목용 소형무개화차를 이용하였다. 건설비는 10만 5천원이었다. 이 운반은 1포(150근 입) 8전 5리로 판로가 구주로 이 광산은 전쟁의 영향을 받아 일시 사업 중지하고 있다.
小宮黑煙鑛 京釜線 黃澗驛 廣場에 每日 積置되야 一見에 大鉛山과가튼 것은 小宮鑛山에서 搬出한 鉛黑이다. 이 鑛山은 慶北 尙州郡 牟西面 十方里 八音山의 東一百萬 坪되는 一大鑛區다. 釜山의 日本人 小宮萬次郞이 光武九年<86>以來로 採掘하야 當時에는 粗鑛그대로 長崎를 經由하야 獨逸에 輸出하더니 目下는 主로 東京을 經由하야 九州方面及 米洲에 輸出한다 品質은 月明鑛과 略相同하고 鑛量은 百五十萬 噸이라한다(總督府調査). 黃澗驛으로부터 鑛山地지 十三哩間에 經便 鐵道를 敷設하고 一日에 二十六噸을 搬出하는데 現에는 前에 比하야 多少 採掘의 規模를 縮少하야스나 尙히 一日에 朝鮮鑛夫 百二三十人 日本人鑛夫 十餘人으로 使用하고 黃澗驛前에는 相當한 事務所를 置하야 事務를 執行한다. 開業以來 今日지 投資額은 約二十萬圓, 融通 資金은 四十萬圓에 至하고 大正九年에는 釜山 送貨가 六千八百 噸, 同十年에는 五千七百 噸, 現今에도 黃澗驛 總收入의 七割은 此鑛山이 占하얏.다 이러한 것을 말하면 朝鮮人은 속만 傷할이오 何等必要가 업지마는 大槪알어두잔 말이다
출처 : 「충북의 3대 명물과 2대광산」 1925년 4월1일 개벽 제58호
황현(黃炫)의 <매천야록(梅泉野錄)> 융희 4년(1910)에 보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황간군에 거류하는 일본인들이 흑연을 채취하기 위하여 철도 간선을 부설하였다. 그것은 황간 서면에서 상주 득수면까지 33리의 거리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용상 교수가 찾은 지도에 필자가 내용을 편집한 자료입니다.
월명탄광에서 흑연을 채취하여 우마차로 운반하던 초창기 사진입니다.
황간흑연채광선도 무동력으로 이렇게 인력으로 운반을 했는데,
대부분 평탄한 길이었지만 상구배에서는 소가 앞에서 끌고 사람들이 뒤에서 밀었다고 합니다.
2018년 8월 1일 이용상 교수가 현지 답사차 황간역을 방문했습니다.
황간면지 편찬위원인 이창주 선생과 고광부 선생도 모셨습니다.
이용상 교수는 자신이 직접 찾아 정리한 초고 내용을 황간면지 편찬에 사용할 수 있도록 선뜻 제공했습니다.
참 고마운 일입니다.
필자도 황간에서 36년이나 살고 있지만, 황간의 옛 지명이나 사람, 역사적 사실에 대해서는 거의 알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어느 지역이나 마을 어르신들은 그 존재만으로도 귀중한 역할을 하는 것이지요.
이 지도도 이용상 교수가 찾은 자료입니다.
이용상 교수와 함께 황간장터와 가장 오래된 교회, 일제 때의 신사 위치, 초등학교, 조선시대의 황간현 터와 신흥역 위치들을
현지 답사했습니다.
그리고 황간흑연채광선 노선을 따라 가보기로 했습니다.
황간흑연채광선은 황간역에서 초강천 둑길~월류봉~너추리보~용암~호음~득수까지 백화산을 둘러 이어지는 길입니다.
승용차를 타고 월류봉을 지나 솔티를 넘어가면 너추리보 둑길이 보입니다.
날도 워낙 무덥고해서 용암리까지만 갈까했는데 가다보니 득수리까지 갔습니다.
인적도 없고 난감했는데 마침 들른 길가 집에 예전 흑연광산에서 일을 하던 주민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 분이 직접 광산까지 안내를 자청했습니다.
뜻이 있으니 길이 있다 싶었습니다.
광산 입구 산길입니다.
과연 길 옆 개울로 폐광에서 솟는 물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이곳이 광산에서 캔 흑연을 쌓아 놓고 반출하던 야적장입니다.
수풀이 우거져 더는 올라가지 못했지만, 몇해 전만해도 주변에 화차며 철길, 기계 등이 방치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내려오다 보니 입구 한쪽에 폐광의 내력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광산 입구 부근에 관사촌이 남아있고, 몇 집에는 사람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광산은 폐광 되었지만, 아직도 사람들이 살아가는 이야기는 이렇듯 이어지고 있는 것이지요.
황간흑연채광선의 위치와 흔적을 대충 둘러보는 수준의 짧은 답사였지만,
주변에는 아직도 많은 이야기들이 관심과 눈길을 기다리고 있다는,
땡볕 속에서도 문득 서늘함을 느낀 시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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