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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간역 시골역장의 고향 충남 논산군 가야곡면 석서리 2구 안골

시골역장 일기

by 강병규 2015. 10. 3. 2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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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무렵 아랫말에 사셨다는 고향 형으로부터 전화가 왔었습니다.

"안골이 고향인가요? 강승규라고 알아요? 쌍계국민학교 나왔죠?"

"혹시 성규 아닌가요? 강성규라면 제 형님입니다만..." 

"아, 그래요, 성규 씨가 내 형님과 친구 되시는데..."

54년생이고 성함은 김용길이라고 하셨습니다.

시골역장이 백수 정완영 동시조 그림전에 그려서 블로그에 올린 그림을 본 고향 선배로부터 

안골 풍경을 꼭 그대로 그린 그림이 인터넷에 있으니 한번 찾아보라는 얘기를 듣고 전화를 한 것이랍니다.

얼마전에 길수 친구라면서 역시 아랫말에 살았다는 김용완 선배가 댓글을 달아 주셨더군요.

참 세상 좁고, 인터넷이 좋은 세상입니다. 

 

시골역장은 1958년 11월 13일 새벽에 논산 연무대-훈련소 입구 동네에서 태어났습니다.

세발 자전거를 타고 찍은 사진이 있었는데 당시 기억은 없습니다.

어린 시절을 기억 속에서 자란 곳은 가야곡면 석서리 안골입니다.

초가집 입구에 텃밭과 샘이 있고 돌계단 오르면 사립문 나오고, 가을엔 별진아비 벌레 구멍이 많던 너른 마당, 안채와 부엌, 툇마루, 돌계단이 높던 장독대,

대추, 석류, 앵두, 사과나무, 큰 옻나무, 밤나무, 까마득 높던 큰 감나무, 울 안의 너른 텃밭, 흙벽돌담과 가죽나무, 탱자 울타리, 돼지감자....

염소 우리, 닭 우리, 소 외양간, 삼태(?)네가 살던 사랑채, 바깥 변소, 울 안 변소...  

비록 작은 초가집이었지만 아직도 시골역장에겐 대궐처럼 큰 기억의 공간입니다.  


집 구조는 오른쪽이 부엌이고

마당에서 계단 하나를 올라가면 뜰팡(마루)이고, 뜰팡에서 부엌으로 통하는 문이 있었고,

뜰팡에서 안방과 뒷방으로 들어가는, 창호지로 바른 문고리 문이 있었고,

안방에는 부엌 쪽으로 선반이 있었고, 겨울에는 선반에서 말린 감꼬지를 꺼내 먹었지요.

좁은 방이었지만 어머니(유순덕), 아버지(강삼준), 성규 형, 성순 누나, 남동생 석규, 여동생 미순이와 나, 일곱 식구의 보금자리였습니다.

얼굴을 본 기억이 없는 바로 위의 승규 형, 그리고 아기 적에 병으로 죽은 막내 동생 미숙이도 함께 살았지요.

뒷 마루로 나가는 문이 있었고 윗방으로 가는 출입구에는 문이 달리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윗방에는 겨울에는 고구마꽝과 가마니 짜는 틀이 있었지요.

윗방에서 작은 창고 방으로 통하는 문이 있었는데,

나보다 8살 많은 성규 형님이 그 창고방을 내 공부방으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 공부방의 작은 창문으로는 키 큰 감나무와 울타리, 장독대가 보였지요.

창고방에서 뒷마루로 나가는 문은 두꺼운 널판지로 만들고 각목같은 나무로 가로질러 잠그는,

마치 부엌문처럼 무거운 것이었는데,

언젠가 도둑이 들었을 때 아버지가 그 문을 어깨로 밀어 열고 도둑을 내쫒으셨다고 합니다.

군대에서 헌병을 하셨던 아버지는 큰 체구에 몸집이 좋은 편이셨습니다. 


우리 집은 외딴집이어서 그랬는지 도둑이 참 자주 들었습니다.

이상한 것은, 낮에 혼자 마루에 앉아 있을 때 부엌 쪽으로 키가 큰 사람의 그림자가 지나가는 것처럼 느껴지면,

꼭 그날 밤중에 도둑이 들곤 했습니다. 

그리고 도둑은 사람 몰래 무엇을 훔쳐 가는 것이 아니라 칼이나 도끼 같은 걸로 마루를 치면서 곡식이나 고추 말린 것 등을

강탈해 가는, 일테면 강도 같은 이들이었습니다.

아버지가 서울로 올라가 목수 일을 하시면서부터는 도둑의 발길도 끊어졌던 것으로 기억헙니다.

아버지가 예전의 청계천 세운상가와 충주 비료공장 건설 당시에 현장에서 찍은 사진도 있었지요.


겨울에 처마 끝에 후래쉬를 비추면서 손을 넣어 참새를 잡을 때의 그 보드랍고 따스한 감촉...

어머니가 시루떡과 정한수를 장독대에 차려놓고 치성을 드릴 때의 그 환하게 주변을 밝히던 촛불...

권중이네 집으로 밤마실 갈 때 성규 형님 등에 업혀 바라 본 은하수의 그 총총한 별빛들...

봄이면 앞산을 물들이던 진달래며...

아득하고도 그리운 기억들입니다.

 

안골에서 토골, 외통재를 지나 고말(?)을 거쳐 냇가를 건너 한참 가면 나오는 쌍계국민학교를 4학년까지 다녔습니다.

어떤 때는 안골에서 참새골 뒷산을 넘어 저수지를 지나고 조용희네 집을 지나는 길로도 다닌 기억이 있습니다. 

5학년부터는 서울에서 다녔고, 고향을 떠난 온 이후 고등학교 땐가 한번 가 본 것이 전부라서 늘 그립기만 한 안골 고향입니다.

 

아까 김용길 형이 아랫말에 아는 친구들 있냐고 물었는데 잘 기억이 없습니다.

상경이와 지호란 이름 기억나고, 아랫말에 살면서 목발을 짚고 대장 노릇하던 형이 기억나고....

학교 가는 길에 있던 고말 저수지 아래 길모퉁이 첫 집인 조용희(?)네 집 생각나고, 눈이 크고 노래를 잘하던 명옥(?),

그리고 계속 1등만 하던 어릴 적의 시골역장을 언젠가 2등으로 만들었던 순희인가 하는

그리운 이름들만 아름아름합니다.    


언젠가 안골을 제대로 스케치해서 큰 그림으로 그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안골에서부터 어릴적 다니던 길을 그대로 따라 지금은 폐교되어 흔적도 없을지도 모르는 쌍계국민학교도 가 보고 싶습니다.

무엇보다 그리운 어린 시절을 함께 지냈던 친구들, 이제라도 보고 싶습니다.

 

 

이 사진들은 며칠 전 석서리가 고향인 김용경 씨가 폰으로 찍어 카톡으로 보내 준 안골의 풍경입니다.

기억이 맞다면 저 나무가 망덕거리와 안골 사이에 있는 팽나무입니다. 저 길 옆으로 우물과 방죽, 그리고 권중 씨 집 앞을 지나 온 물줄기가 흐르는 개울이 있고,

어릴적 그 개울에서 집게에 털이 붙은 참게도 잡았었습니다.

곱고 반짝이는 고운 모래가 맑은 개울물에 쓸려 흐르던 그 모습,

백수 정완영 시인의 동시조를 읽노라면 늘 눈에 선해집니다. 

 

 

이 집이 길수네 집, 재실입니다. 길수 씨는 아마 시골역장보다 두서너살 많은 것으로 기억합니다.

재실 뒤 왕솔밭이 있고, 어릴적 지게로 솔잎을 한 짐 지고 일어나다 그대로 앞으로 넘어져 바둥거린 기억이 있습니다. 성순 누나가 일켜 주었지요. 

재실 왼쪽 편으로 방애꼬라 불리던 영순이 영숙이네 집이 있었습니다.

영숙이는 내 또래이고 영순이는 동생 석규 또래입니다. 영숙이 아버지는 김창식 씨입니다.

매번 잘 놀다가도 헤어질 때면 꼭 상대방 아버지 이름을 부르는 것으로 욕을 대신 했던 어린 기억이 아직 생생합니다. 

 

시골역장의 고향집은 영숙이네 집 아래 편에 있었습니다.

약간 오르막이었고 큰 밤나무가 있었는데, 네댓살 때 영숙이네 집에 놀러갔다 내려오는 그 길에 그냥 주저 앉아 꼼짝도 못했는데 당골 무당이 와서 굿을 한 후

대번 나앗다고 합니다. 길 대감인가 나뭇대감인가가 그리한 것이었는데, 자칫 앉은뱅이가 될 뻔했다고 합니다. 

 

 

백수 시인의 시를 읽으면서 연상되는 풍경을 그린 것인데,

그리면서 생각은 줄곧 안골 마을 가는 길을 맴돌았지요.

 

 

박수근 화가의 그림을 모사한 것입니다.

어떤 풍경으로 그리더라도 마치 내 고향 안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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