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 정완영 시인이 2016년 8월 27일 (토) 오후 3시경에 영면하셨습니다.
향년 98세입니다.
백수 시인은
'현대 시조의 선구자로 시조의 중흥기를 연 한국 시조계의 거봉'
'평생 고향을 동경한 시조 대중화의 선구자'로 일컬어지는 시인입니다.
시를 배우거나 쓰는 사람도 아니고,
백수 시인의 제자도 아닌 시골역장이 이런 글을 올리는 것은,
자칫 시인께나 주변 이들에게 누가 될 수도 있을 조심스런 일입니다.
하지만 최근 몇해동안 시골역장은 '한국 시조의 거봉'인 백수 시인을 가까이에서 뵙고,
평생 고향을 동경하며 뭇사람들에게 마음의 고향을 일깨운 시인의 깊고 높으면서도
더 없이 맑고 아름다운 시어들과 함께 하는,
크나큰 영광을 누렸습니다.
그런 처지이다 보니,
어떤 형식이든 시인께 대한 흠모와 감사의 정을 표현하는 것이 도리다 생각했습니다.
시골역장이 백수 시인을 처음 뵌 것은
2013년 12월 1일, 황간역 앞 식당에서였습니다.
최정란 시인이 주선(?)을 한 일이었고,
김천에서 선생님을 모시던 장귀순 시인과 제자인 이상구 시인과 함께 오셨습니다.
비좁은 식당에서 큰 시인께 큰 절부터 올렸습니다.
시골역장이 백수 시인을 뵙게 된 사연은 이렇습니다.
최정란 시인으로부터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김천에 사시는 백수 시인께서
거의 매주마다 황간에 오시는데,
역 앞에 있는 식당에서 올갱이해장국과
백주-시인께서 낮에 드시는 막걸리- 딱 반 잔을 드시고
수봉재 너머에 있는 오도티 마을을 들러 가신다.
오도티 마을은 노 시인이 90여년 전에 떠난 이후
다시는 가 보지 못한 외갓집 동네이다.
외할머니와 어머니의 고향 마을이라고 찾아는 가시지만,
맑게 흐르던 시냇물과 큰 나무가 있던 정경만 어렴풋이 떠올리실 뿐
외갓집 터가 어디인지는 기억조차 못하신다....'
그 말을 듣고 생각을 했습니다.
'만약에 황간역에 김소월 시인이나 정지용 시인, 또는 헤르만 헤세가 찾아온다면,
그들이 대합실 의자에 잠깐이라도 앉았다 간다면,
시골역장은 그 사실을 엄청 영예롭게 여기고
시인이 앉았던 의자에 표시도 하여 잘 보전을 하고,
그 사실을 두고두고 자랑할 것이다.'
그런데 시골역장이 알기에 백수 시인은 그런 시인들에 결코 못지않은 대 시인이었습니다.
황간역은 그런 대 시인의 외할머니와 어머니가 기차를 타고 내렸던 고향역입니다.
백수 시인도 어렸을 때 외갓집에 가려면 기차를 타고 황간역에서 내렸을 것입니다.
그리고 백수 시인은 평생을 두고 외갓집 고향과 어머니를 그리는 주옥과도 같은 시를 썼습니다.
그러니 황간은 백수 시인의 외갓집 가는 길목이자 어머니와 고향을 그린 시의 고향이고,
황간역은 백수 시인의 마음의 고향역이 되는 셈입니다.
백수 시인은 김천에 사시는 동안에는 거의 매주 황간역을 찾아 주셨고,
산본에 사실 때에도 김천에 오시는 길에는 꼭 황간역에 들르실 정도로
황간역과 시골역장을 각별히 여겨주셨습니다.
그 덕분에 시인을 모시고 몇 차례의 시화전과 음악회도 열 수 있었습니다.
황간역은 백수 시인을 존경하는 시인들과 음악인들에게도 의미있는 공간이 되었습니다.
시를 잘 알지 못하는 시골역장이지만,
백수 시인의 시를 좋아하는 까닭은 있습니다.
시 읽기가 쉽습니다.
시를 위한 조어가 아니라 일상의 언어이기 때문입니다.
쉽게 읽히는데 읽으면서 감동을 하게 됩니다.
때론 아득히 깊고 높은, 그리고 먼 곳도 느껴지고
어릴 적 놀던 고운 모래 쓸리는 맑은 시냇물도 훤히 다 보입니다.
백수 시인은 참 놀라운 분이셨습니다.
90세 즈음에 지은 시들조차 어쩌면 그리도 맑고 순수한 동심을 지니셨는지!!!
그리고, 대합실 의자에 앉으셨을 때나 , 역 마당을 걸으실 때나,
식당에서나,
당신의 시와 정지용 시인의 시를 비롯한 시를 줄줄 낭송하셨습니다.
그리고 시골역장에게까지 시론을 말씀하셨습니다.
하다못해 지팡이를 짚으실 때도 漢詩를 하셨고
지팡이 짚고 일어서시면서도 漢詩를 하셨습니다.
백수를 넘어 사시면서 더 많은 시를 쓰시고
더 많은 가르침을 주셔야 할 시인이셨습니다.
시골역장의 생각에 백수 정완영 시인은,
경북 김천에 있는 황악산과도 같은 시인입니다.
봉우리 연이어 산세는 웅장하고
우러르기도 높아 구름 바람조차도
함부로 넘나들지 못하는 산입니다.
하지만 그 골짜기마다에는
노루 다람쥐며 산돼지도 뛰놀고
학이며 종달새 까마귀도 노래합니다.
직지사 인경소리에 산새며 짐승도 잠들고
환한 절 마당엔 철따라 능소화며 백일홍에
산 중턱 진달래와 들국화 향기도 그윽한 산입니다.
사실 시골역장이 백수 시인의 팬이 된 것은
시인을 뵙기 오래 전, 이 글을 읽은 때부터입니다.
1969년에 펴낸 첫 시집 채춘보의 서문입니다.
序
깊은 산 어느 숲 속 湖水 가에 선 사슴이 제모습을 못물에 비쳐 보면서
뿔은 참 향그럽게 타고 났는데 다리는 너무도 머주가리 없이 생겨먹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 때 砲手가 銃을 겨누며 나타났다.
사슴은 느닷없이 뛰었다.
어느 바위 틈에서 숨을 돌린 이 사슴은,
방금 그 머주가리 없다고 생각한 다리는 잘도 달려주어 제 목숨을 求하는데 一役을 다 했지만,
그렇게 향그럽게 타고 났다고 느껴지던 뿔은 나무가지에 부딪고 칡넝쿨에 걸리고하여
몹시도 주체스럽기만 했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제 목숨이 다리를 가꾸기 위해 생겨난 것이 아니라,
뿔을 섬기기 위해서 태어났다는 것은 미처 생각지 못하고 있었다.
나의 노래는 나의 뿔,
나의 冠이었다.
이 뿔에 감기는 하늘빛은 몹시도 애달팠다.
앞으로 한세상을 살아가는데 거추장스럽기야 하겠지만
그레도 이 뿔을 고이 고이 간직해 두었다가
내 사랑하는 祖國,
내 사랑하는 兄弟 앞에 벗어 놓고 가야겠다.
그것만이 주어진 목숨에의 갚음의 길이라 느껴지기 때문이다.
一九六九年 己酉 菊日
黃嶽山下에서
著者 識
평생을 오직 시인으로만 살아 오신 백수 시인,
그 시인이 마침내 벗어 놓고 간 뿔과 冠,
그 노래를 마음으로 새겨듣는 것,
우리의 복이자 몫이기도 하겠지요.
고독을 넘어선 고적 속에서 한평생 시인으로만 사셨던 올곧은 '詩人'
시골 고향역을 사랑해 주셨던 시인 할아버지,
백수 정완영 시인의 명복을 빕니다.
<백수 정완영 시인의 문학세계의 일면을 소개한 동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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